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문단 편집) === 전면적인 오인 === 여기서 문제는 그 [[프랑스군]]의 교리는 [[일본군]]이 오인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전통적으로 [[백병전]]과 [[총검술]]을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나폴레옹 전쟁부터 한국전쟁까지 총검술을 애용한 군대가 프랑스군이다. 그러나 이는 __전통적으로 돌격만능주의가 아닌, 화력전의 마무리나 최후의 수단으로 백병전을 중시__한 것이다.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부터 포병 출신이었고, 그가 남긴 어록 중에는 “신은 가장 강한 포병을 가진 쪽의 손을 들어준다“ 라는 말까지 있다. 프랑스군은 화력을 중시했고, 사격전만으로도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사격전을 등한시하지 않았다. 여느 국가들처럼 명사수들로 조직된 경보병을 적극 활용해 성과를 톡톡히 보기도 했고, 자신들이 영국 [[레드 코트]]에게 자주 화력전을 당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프랑스군은 총검술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총검돌격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당시 영국군을 제외하면 화력전을 위한 실탄훈련을 할 돈이 없었다. 당시 머스킷과 화약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영국군만이 당대 최고의 부국이니 재력이 뒷받침되고, 인도에서 초석을 대량으로 가져올 수 있으며, 육군을 크게 키울 이유도 여유도 없어 소수정예를 지향해 훈련비가 타국보다 적었기에 실탄훈련을 충분히 했다. 이런 마당에 영국군과 화력전을 한다는 건 미친 짓이었으니 영국과 프랑스의 전투는 초반에 총탄을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간을 보다가 제자리에 서서 지속적으로 사격을 퍼붓는 영국군을 향해 프랑스군이 쪽수를 믿고 돌격하여 포위섬멸하거나 중앙돌파로 전열을 와해시킨 후 섬멸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프랑스군도 포와 소총에 예산을 아낌없이 썼기에 화력이 우수했다. 포는 조준기를 개량해 조준시간을 줄이고, 경량화 및 표준화했으며, 포대마다 말을 붙여주어 기마포병대를 큰 규모로 조직했다. 타국에서 신형 소총이 개발되어 전력이 벌어지면 같은 수준의 소총을 빠르게 개발 및 배치해서 금방 차이를 메꿨다. [[샤스포 소총]]과 [[그라 소총]]이 대표적이다. 그 유명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탄생배경도 포병 병과의 특성상 사격은 제원을 계산해줘야 실시가 가능해 수학이 중요한데 그 시대엔 컴퓨터가 없으니 당연히 계산은 직접 해결해야 해서,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들을 보내 포병장교로 육성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의 포병장교 또한 두뇌 회전이 빠름과 동시에 군인의 기본적인 미덕인 체력, 강인함까지 함께 지닌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 밀덕들이 [[엘랑 비탈]]을 착각해 비난하는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 수뇌부들에게도 총검보다 화력이 중요하다는 게 당연했다. 1차 대전 이전에는 [[1897년식 75mm 야포|최초의 현대식 화포]]를, 1차 대전 도중에는 지금도 서구권의 표준이 된 155mm 야포를 개발배치했다. 프랑스의 공세주의, 정신주의 교리는 [[보불전쟁]] 이후로 추월당한 인구와 국력의 한계를 메우기 위한 국가 정책으로서의 고육지책이었다. 나가 싸우는 군인과 살림이 궁핍해진 국민 모두 힘들어도 끝까지 동요도 포기도 하지 말아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불리하다고 방어에 집중하면 언젠간 뚫리고 수습이 안되며, 계속 공세에 적극적이어야만 오히려 상대가 방어에 바빠지고 상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기에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당시 프랑스의 상황에선 최선의 방어는 공격임과 총력전 특유의 심리전을 설명하고 그 중요성을 역설했지 훨씬 강한 국가나 다수의 국가들을 한 번에 상대해도 정신력이 모두 해결해준다고 한 적도 없으며, 전술 단위에서 화기와 전술 연구개발을 정신력 향상에 집중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즉 일본은 전략 단위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전술에도 적용하는 대참사를 벌인 것이다. 이와 함께 [[슐리펜 계획]]을 매우 높게 평가하면서 섬멸전 개념을 받아들인다. 당시 일본군에게 있어서 슐리펜은 군사적 천재로 평가받았으며 이 작전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실패 원인은 전부 小몰트케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본이 이렇게 슐리펜 계획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당시 일본은 유사시 독일과 같은 양면전쟁 상황에 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일본 해군은 미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보고 있었다. 이에 더해 [[탄넨베르크 전투]]가 단기결전 전략 채택 및 수행을 고취시켰을 수도 있다는 [[http://flager8.egloos.com/2947451|의견]]이 있다. 이것들이 기존에 백병전을 중시한 일본의 교리와 결합하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낸다. * 슐리펜식의 섬멸전, 포위 섬멸, [[기동전]]을 수용하고 이를 중요한 사상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서 말하는 기동전은 단기간의 결정적 전투로 전승을 달성하는 전쟁 수행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면서 핵심을 속전속결에 둔다. 적보다 먼저, 적이 저항조차 하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한 방을 먹이면, 적이 항복하리라는 것인데 여기까진 정상적이지만, 이 강력한 한 방이 압도적인 화력이나 병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일본군의 공격 정신 즉, 확고한 황군 사상과 필승 불패의 신념이다. 그리고 군비 경쟁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정신력만큼은 결코 질 수 없다면서 잠재적 적성국(중국, 소련, 미국)은 일본보다 정신력이 열등한 군대라고 분석했다. 그래서 강력한 한 방은 정신력을 극대화하면서 적의 약점인 정신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20~1930년대를 지나면서 이는 교리화, 경직화된다. (이상의 내용은 三野正洋의 <日本軍の小失敗の硏究>에서 인용.) 특히나 이 시기에 일본군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식 백병전이 중국군과 군벌세력을 상대로 제법 통하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고 편향적 피드백까지 겹치며 해가 지날수록 더욱 미쳐간다. > ◎ 총검술, 특히 백병사용에 익숙해야 >이번 사변(※제1차 상해사변)에 있어서 아군이 항상 적을 물리치고 도처에 용전분투하며 그 공방 중 언제든, 혹은 탄약 소진시에 불시에 적습을 당한 적이 무수히 많았지만 수배 내지 십수배의 적에게 태연히 적을 지근거리에 끌어들이고 최후에는 총검을 신뢰하여 마침내 이를 격파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는데 실로 아군에 백병전을 벌일 자신이 있는데 반하여 그럴 자신이 없는 적군에게 우월함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偕行社記事第六百九十七号附録』,1932,p.8) >1.근대전과 검술의 관계여하 > >근대에 있어서 과학병기의 눈부신 발달은 옛날의 [[일기토]](一騎討ち)와 같은 개인적전술을 기계적집단전술로 일변시켜, 그에 의해 일시 검술 등은 경시되는 풍조가 있었으나, 유럽전쟁의 말기즈음에 이르러 다시 중시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공격병기의 놀라운 발달은 오히려 전선의 고착을 유발하여 주간에 양쪽이 거리를 두고 엎드려 사격하게 되었으며 쉽게 적에게 육박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 >그런데 야간이 되면 과연 공격병기도 위력을 줄어드는지라 적과 아군 모두 참호에서 뛰어나와 서로 적진지를 탈취하려 한다. 그리하여 야간의 [[백병전]]이 되면 대포나 소총으로는 너무 늦으므로 서로 [[도검]]으로 싸우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다시 검술의 중요성이 재확인됨에 이르른 것이다. > >그리하여 황군에서도 군의 기계화에 즈음하여 더더욱 검술의 연마에 임하며 우리나라 전통의 무덕을 함양하고 체력을 단련하여 건강한 기력과 담력을 양성하여 드디어 국군만의 독특한 위력이 된 것이다. [[만주사변]]은 특히나 이번 사변에 있어서 수많은 혁혁한 위훈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검술연마의 덕이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옛 무사들의 무용을 잇는 적병 수십명을 베어버린 수훈담이나, 혹은 단신으로 적전차 격파등의 근대과학전에는 볼 수 없는 기적을 낳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크게 진보한 기계화전쟁에 있어서도, 최후의 승리를 결정하는 비결은 백병전에 있으며, 따라서 백병전의 요결은 무도의 통달에 의한 강건한 기백과 담력의 양성에 의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육군각종병과 모범군인교전 전술』 제7 편 1934 >실제로 지금 다음의 지나사변에서는, 적의 사상 원인의 6할이 백병전인 것으로도 그 필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아오키 야스시, 『병기 독본』, 1937, p. 15) >"보병은 타병종과의 협동이 부족하지만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고, 마지막으로 총검으로 재삼재사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섬멸할 의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보병의 본령이다.(사이토 시 히라저, 1941, 『군대 정신교육의 참고』, p.114) 그렇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먹히지 않을 전술을 [[태평양 전쟁]]까지 활용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